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아리스토텔레스( Rhetoric )를 향한 또다른 시선

 

2020. 1.     9:30 AM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le애러스터를 <영어 발음>-기원전 384- 기원전 322)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 , 플라톤의 제자이며,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다.  물리학, 형이상학, 시, 생물학, 동물학, 논리학, 수사학, 정치, 윤리학, 도덕 등 다양한 주제로 책을 저술하였다.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함께 고대 그리스의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며, 그리스 철학이 현재의 서양 철학의 근본을 이루는 데에 크게 이바지했다.   서양 철학의 포괄적인 체계를 처음으로 창조하였다.

                                         

흔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천 년 동안 인정받아 온 듯이 설명되곤 하나, 사실은 그 반대다.   서로마 제국 멸망 후, 아리스토텔레스는 유렵에서 오랫동안 잊혔다.   기독교는 아리스토텔레스보다 오히려 플라톤의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신플라톤주의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을 제외하면 유럽인들의 관심 밖이었고, 기독교는 플라톤의 이데아 롬을 끌어와 신의 섭리를 주장하려 했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플라톤의 중기 이데아론을 격하게 비판한 제자이니만큼 기독교 측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대상이었을 것이다.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불태워서인지 그의 원전을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고 하는데 사실 카이사르가 불태운 서적들은 당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소장되기 위해 대기 중이었던 책들이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에게 선물로 페르가몬 도서관의 장서 20만 권을 선물했기에 큰 타격은 아니었다.

그의 작품들이 사후에 저작들이 흩어진 이유는 그가 아테네에서 추방당한 탓이 컸다고 한다.   그 후 창고에서 썩어가던 저서를 덕후가 사들여서 수집, 보관한 덕에 지금 정도의 저작이 남게 된 것이다.  휴~ 큰일 날뻔했다.  감사!!  

일단 로마 시대까지만 해도 세네카나 키케로 같은 로마 철학자들이 그의 서적을 필사하기도 했고, 철학의 입장에서 보면 쓸데없는 기록뿐이라고도 하는데, 사학의 자료로 쓰자면 전혀 그렇지 않다.   사실은 오히려 전문 역구 서적이 더 많이 남은 셈이다.

     

안나 콤네니

어쨌든 로마 제국 이후 아리스토텔레스가 보존된 곳은 당연히 로마 제국을 비롯한 동방 영토에 자리 잡은 동로마 제국이고, 안나 콤네니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주석을 다는 작업을 후원했다.   이슬람 세계에서도 많은 연구가 이어졌고, 십자군 전쟁을 통해 처음으로 아랍어로 번역 되었으며, 그 후에는 그리스어로 된 원전이 번역되어 유럽의 정신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그 충격의 힘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은  유렵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누리게 된다.  심지어 기독교 신학에서도 아우구스티누스 이래로 플라톤 철학에 기반을 둔 전통사상에서 벗어나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기반을 두는 움직임이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기독교 입장에서는 이교도임에도 불구하고 신학까지 변화시킬 정도로 당시 유럽의 정신세계를 뒤흔들어 놨다.  덕분에 물리 천문에서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코페르니쿠스, 화학에서는 라부아지에한테 교정될 때까지 그의 권위는 흔들리지 않고 지위가 유지됐다.

 

기본적인 그의 학문적 방법론모든 사물을 범주화하고 어떤 사물이 그 사물이게 하는 본질을 제시하는 데 있다.   그 본질을 통해 사물의 운동과 변화를 설명한다.  모든 사물의 운동과 변화는 역학적인 방식이 아니라 사물이 자신의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설명된다.   그렇기 때문에 공간 안의 사물의 위치 변화 또한 에너지나 힘과 같은 약학적인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닌 각 사물의 본선에 따라 정해진 위치로 돌아가는 자연적 경향에서 찾는다.  오늘날의 시각에서는 미신적이고 우매해 보이는 물리적 설명이 가끔 나오는 이유가 그것이다.

하지만 비웃을 수 없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야 말로 과학적 방법론의 기초를 닦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인식능력에 대해 최초의 단계적 분석을 시도했고 논리학만 뿐만 아니라, 그 분석을 기초로 하여 경험을 통한 일반화라는 과학뿐 아니라 학문의 방법론 자체를 처음으로 정립한 사람인 것이다.   고대인의 관점에서 '합리적' 설명을 시도하다 보니 무리한 해석이 나오긴 했으나, 이 시대는 자연과학 자체가 분리된 학문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철학과 한 묶음이었던 시대였으니 말이다.    근대에 오면서 나오는 반론들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근대 과학이 바로 그의 방법론을 '극복' 하는 과정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단순히 앞선 시대의 방법론이라는 '자료'로만 남았으면 좋았겠으나,  불행히도 아리스토텔레스는 필요 이상의 권위를 가지게 되었고, 근대 과학의 방법론은 그의 권위와 맞서 싸웠으나 이 또한 이런 충격으로 근대 과학이 시작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2019. 9. 

 

물리, 천문, 화학에서는 반론도 많지만, 동물 분류학에서는 성게의 크기가 달의 차고 기욺에 따라 크고 작아진다고 쓰기도 했고, 그 시적에 이미 고래를 포유류에 가까운 종류도 따로 분류했다.   단, 포유류에 포함시킨 것은 아니다.


윤리학 부분에서는 자격, 목적, 좋은 삶, 중용 등이 주요 개념이다.   자격은 어떠한 사람이 어떠한 대접이 적절한지는 그 행위나 대상의 목적에 따라 다르다고 한다.   그리고 개인은 좋은 삶을 자행하며 사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종의 웰빙인셈이다.   중용은 적절하신 그분을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적절한 행동을 강조했다.

논리학과 삼단논법의 창시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체계를 닦아놓은 논리학은 르네상스를 거쳐 '형식 논리학'의 틀을 이루게 된다.   이후 프레게, 조기 불, 버트런드 러셀이 등장하여 '기호 논리학'으로 불리는 현대 논리학의 새로운 조류가 나타날 때까지 사실상 이 분야의 독보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문학에서는 시학을 통해 체계적인 문학비평의 효시가 되었다.   시학에서 비극의 작동원리를 카타르시스라고 규정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나 카타르시스는 전문을 걸쳐 단 한번 언급될 뿐이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오히려 시학 전체에 걸쳐 플루트를 가장 강조하였다.   시학은 현재 관점으로 보면 제작 학적의 성격이 짙으므로 본격문학보다는 대중문학 이론에서 더 자주 언급된다. 

 

스승인 플라톤이 예술, 곧 '모방'은 이데아의 모방인 현실세계의 2차적 모방이라고 규정하고 천시하고, 그 때문에 '국가'에서 시인 추방론을 역설한 것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다루지만 시(서사시)는 보편적인 것을 다루므로 시가 더 철학적이다'라고 하여 문학의 존재가치를 역설하였다.   무슨 말이냐면, 실제 역사는 우연적인 인간의 행위에 크게 좌우되며, 불완전한 인간의 의식이나 행위가 그 대상이 되기 때문에 전범으로 삼을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학은, 물론 최고 수준의 문학이 그 기준이지만 대단히 아름다우며 지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완성되어 있기 때문에 역사보다 문학이 더 우월하고 추종할 만하다는 것이다.

참고로 시학이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필기한 것으로 내용 대부분이 비극론에 관한 것이다.  비극을 문학에 최고 형식으로 여겼으며, 비극론을 정리하면서 카타르시스( 감정의 정화, 배설)를 주장하는 한편, 줄거리, 성격, 문체, 사상, 시각효과, 작곡의 6가지 요소를 비극의 구성요소라 하였다.

 

4원소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4개의 원소는 다음과 같다.

  * 뜨겁고 건조한 성질을 지닌 불(Fire)

  * 차갑고 건조한 성질을 지닌 흙(Earth) 

  * 뜨겁고 습한 성질을 지닌 공기(Air)

  * 차갑고 습한 성질을 지닌 물(Water)

하지만 물이 수소원자 2개와 산소 원자 1개로 이루어졌다는 게 밝혀졌고, 공기도 사실 산소, 질소 등 등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대부분이고 흙도 여러 분자로 이루어졌다는 게 밝혀지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 소설이 틀렸다는 게 증명되었다.

 

기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티모테오스의 저작을 인용하여 소개한 바에 따르면, 말이 어눌했고, 다리가 가늘었으며, 눈은 작았고, 항상 화려하게 옷을 입으며, 반지를 꼈고, 머리는 짧게 깎았다.   성격은 오만하고 절제가 없었으며 식탐이 있었고 남을 조롱하는 습관이 있었다고도 한다.

 

그리고 유언장에는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는데, 제자인 테오 프라토스에게는 그가 만약 자신의 첫째 부인 소생의 딸고 결혼하기를 바란다며 그렇게 하도록 전하고 있다, 두 번째 부인은 재혼을 원한다면 그에 걸맞은 사람과 재혼하도록 전하고, 아직 나이가 어린 노예가 약간의 재물과 함께 자신의 친족 밑에 들어가도록 전하고 수중의 재산을 친인들에게 알맞게 나눠주도록 했다고 한다.  그리고 먼저 죽은 첫째 부인의 유골과 함께 묻어줄 것을 소망했다고 한다.

 요즘으로 치면 유명 병원장( 마케도니아의 어의였다) 아들이었으며 명문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명문가인 왕가의 딸과 결혼했으며 나중에는 졸업한 명문대에 버금가는 명문대학을 건립한 성공한 철학자이다.   하여 '구질구질한 다른 철학자' 들과는 반대였으며 당대 세계 정복자의 스승이기도 했으니 성공한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영혼에 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설명은 서양의 인간관을 정립하는데 초석이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인 플라톤의 영혼관을 부정한 것이지 영혼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인간의 본질을 영혼이라고 본 플라톤에 반해 인간은 영혼과 신체의 결합체임을 강조했고, 영혼은 형상, 신체는 질료 하고 주장했다.   플라톤은 신체를 영혼을 가두어놓은 일종의 감옥 상태로 보았는데, 영과 육에 대한 스승의 극단적 이 부분을 배격한 것이다.   "영혼의 활동을 위한 사람들의 서로 다른 기질은 그들 신체의 서로 다른 기질에 의존한다"라고 표현하였다.   사람의 감정과 이성은 영혼의 활동이지만 호르몬, 신경간의 전기적 자극 등과 결코 동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다면서 그 유명한 표현 "훌륭한 신체에 고결한 영혼이 깃든다"라는 명언을 남긴다.

지성인이 되고 싶다면 아리스토텔레스 원전 읽기에 도전해보라.   철학사에서도 가장 어려운 저서를 남긴 것으로도 악명이 높다.   즉 자기 자신만이 이해하기 위해 썼던 것 말고 다른 남아있는 게 없으니 ㅠㅠ


그리고 저서 중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의 아들 니코마코스를 위해지었다고 알려졌으나 재밌게도 그의 아버지 이름도 같다.   이 책을 직접 읽어본다면 읽는 사람에게 충분히 심적 고통을 줄 수 있을만한 글이라고 한다.

도전해 보실 분~~

 

그런데 이런 그에게도 괴담이 하나 있다.

애첩인 필리스와 시간을 보내느라 여념이 없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스승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자를 멀리하라고 충고를 하고, 제자는 애첩을 멀리하게 된다.    곧 필리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원인임을 알고, 복수를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를 유혹한다.   결국 노스승은 여자에 빠져서 그녀를 등에 태우고 채찍을 맞으며 놀다가 이 모습을 들키고 알렉산드로스는 당황해한다.   그러나 그는 늙은 자신도 여자를 저항할 수 없는데, 젊은 너는 어떻겠냐며 얼버무리고 대왕을 스승의 실수를 눈감아 줬다고 한다.

 

사실은 13세기 프랑스의 노르만 시인인 앙리 당들리가 만든 시며, 유물도 그 시대 이전의 것은 없다.   그리고 이는 당대에 널리 퍼졌던 재미있는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의외로 금욕적인 기독교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였다.  '여자를 멀리하라'라는 교훈을 담은 이야기는 교회 주교들이 직접 들려줄 정도로 전 유럽에 널지 펴져 있고 많은 조각상과 그림도 남겼다.

다만 필리스라는 이름은 독일 쪽에서 처음 등장한 것으로 보이며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말로 표현될 정도였던 중세 분위기상 이것보다 더 가십거리는 없었을 듯하다.   또한 필리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내였다고 한다.   진위는 가리기 기가 힘들듯 싶다.

 

 

과연 철학이란 무엇인가

나는 왜 철학을 이해하려고 애쓰는가

파고 들수록 더 꼬이는 나의 뇌 ㅋㅋ  

그래도 계속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