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인생중 PEI의 삶을 오즈의 마법사에 비유해 보곤 한다.
결혼과 이혼이라는 쓰나미급 나의 인생 속에서 다른열린 문을 통해서 나는 세상의 마법사들을 만나기위해 대서양을 건너 오면서 나의 인생을 급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는 모험과 도전을 즐기게 되었다. 특히 이곳의 목가적인 삶은 도시에서만 산 나의 많은 것을 바꿔놓고 있다. 물론 사랑스러운 우리 아이들에게도 지대한 경험과 안정되고 기본적인 삶의 발판이 되고 넉넉한 인성과 감각을 줄것이다. 건축과 교수 유현준님의 '어디서 살것인가' 책에서 처럼 말이다. 울 애들에게 경제적 넉넉함을 주지는 못하지만 공간적 넉넉함을 선사하고 있어서 뿌듯하다. 물론 그들은 반대로 원할것이지만. 이기적인 나!!
그들이 이 넓은 세상에서 그들의 꿈을 맘껏 펼칠 수 있도록 방목하기 위해 이곳에 온것이 아닌가! 그들이 지금은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지만 인생의 큰 밑걸음이 될 '좋은 기회'다.
듣든 안듣든 감사하자며 세뇌시키고 있다. 시간과 공감각이 합쳐지는 또다른 세계로의 여정들에 가슴이 울렁인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끝도없이 다시 하게 해 준곳도 이곳이다.
내가 왜 태어나서 울아이들에게 이런 비극을 안겨주고 이렇게 이국에서 이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과연 우리는 앞으로 또 어떤 새로운 일들이 발생하고 해결하고를 반복하게 될까
역사란 지독하고 지독한 것이라는 어느 작가님의 말처럼, 지독함은 인생을 함께할 중요한 단어다.
나는 집을 알아보았으나 내 예산에도 너무나 동떨어져있었고 수입도 없는 상태였으며 자격조건도 안되는 이곳에서 집을 구하기는 힘든상황이다.
그러다가 이곳에서 만난 1호분의 집 지하가 비었으니 나의 거처를 찾기 전까지 있으면 어떠냐는 제안을 받았다. 갈곳이 없으면 첫사장님께 부탁을 해야 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물불을 가릴때가 아니었고 염치없이 기다렸다는 듯이 낼름 받아 먹었다. 얼마나 고맙고 또 감사한지 또 다른 천사를 만났고 나도 언젠가는 남들의 천사가 되리라고 맘먹었다. 그리고 면접 본 곳에서는 시범삼아 와서 저녁 시간에 테스트 해보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한명도 아는 이 없던 이곳에서 새로운 인연들이 만남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나의 역사적 감격의 순간은 진행중이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한 인생이 오는 것이다. 생생한 역사책들이 하나둘씩 쌓이고 있다. 새로운 분들과의 새로운 만남은 내게 큰 인생의 가르침이 될것이라 생각되었다.
사실 이혼을 하고 그 이후로는 거의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기 싫었고 꺼려졌다. 직장은 학원이었기에 나의 맘을 충족시며준것 같다. 학생들과 집에서는 울 애들(그래서 나는 아직도 아동틱하다?) 그리고 몇몇의 학교 엄마들과의 학교소식의 소통이 전부 였고 가족들도 꺼렸던 시간들이었다.
직장이라는 사회는 많이 다르다.
몇십년만의 새로운 경험들은 기쁨과 두려움들의 선물 보따리들이 한꺼번에 쏟아 부어주었고 나는 축복인지 고난인지 선택은 내 몫이다.
그래서 나는 20대 초년생의 삶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나는 열정적이어도 된다. 이런 경험들은 내가 20대에 경험하지 못했던 물리적 경험과 정신적 자양분이 될것이다. 그렇게 나의 5춘기는 익어가고 있었다. ( 갱년기를 느낄 틈이 없었음)

시간의 길이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주장을 믿는다.

질경이, 그냥 밟고 지나가던 질경이의 특징을 알아보니 멋진 녀석이었다.
바닥에 붙어 자라는 특징으로 숲속에서는 살 수 없는 도시형 식물. 대로변에서 살다가 지나가는 사람이나 차에 밟혀도 기죽지 않는 강한 생명력이 도리어 바퀴나 신발에 포자를 퍼트리는 대견한 녀석이다.
잡초인 제가 고귀한척 산것 같아 부끄러워졌다. 인간도 인내하기 힘든 위기들을 기회로 삼는 지혜를 배웠다.
그러고 보니 세상의 스승 아닌것이 없다는 말이 실감난다.
아들이 온다고 비행기 시간을 알려주었다. 짧았던 혼자만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헤어진 아이들이 그리워서 어쩌나 했는데 지금은 약간 섭섭한 기분은 뭘까
끝으로 김수영의 시의
(...)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더 먼저 일어난다
(...)
바람 많은 이 섬. 내 모습과 오버랩이 된다.
여러 자아로 표현되는 이런 내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