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하는 날이다. 모처럼 날씨가 쨍해서 기분이 좋다.
이사할 곳이 공사하다가 중단된 지하이지만 그녀의 호의에 감사함과 함께 비루한 처지가 애처러웠다.
아들에게도 설명을 했더니 한 마디 한다. " 으그 우리엄마 000 "
공항에서 아들을 픽업해서 그녀의 지하실에서 우리의 새로운 생활이 시작됐다.
아들이 7월 말에 왔으니 이곳은 축제분위기 였다. 길위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그리고 그 짧은 여름은 발악이라도
하는듯 강열함을 발산하고 우리도 덩달아 좋은 날씨에 걱정은 날려보내고 낚시를 하러 이곳 저곳을 다녔다. ( 이 곳은 정말 겨울이 길고 봄이 없으며 여름은 한두달이 고작이다)
그녀와 우리는 낚시를 갔다. 아들은 예전에도 낚시에 흥미가 별로 없었으나 바다낚시 한 번해보라는 권유에 따라 나섰다.
주변에 사람들은 자리를 잡고 앉아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많이 잡은 사람들도 보였다. 고등어들이 각각 통에 담겨서 좁은 곳에서 아우성 치고 있었다. 우리도 자리를 잡고 앉아서 때론 서서 집중했으나 잡히지 않았다. 우리셋중에 유일하게 아들이 고등어 한 마리를 잡았고 우리는 웃으며 집으로 왔다.
그 고등어로 회를 쳐서 한 두조각씩을 을 나눠 먹었다. 비린맛 없는 상큼한 바다를 한잎 베어문 그날의 느낌은 책에 꽂아둔 단풍잎처럼 내가슴속에 물들어 있다.
그녀와 나는 야생케일을 따다가 갈아서 마시고 김치도 담궜다. 블루베리, 라즈베리를 따먹으며 트래일을 걷는다.
이렇게 우리셋은 자연스럽게 동거에 들어갔다. 그녀의 배려 덕분이다.
조개와 굴도 캐고, 바다가 햇빛에 반사되서 찬란하게 빛나는 그 광경들은 모네의 그림의 실사였다. 찬란한 하루하루였다.
자본주의에서 격리된 내 인생의 또다른 절정인 날들이다. 나보다 한참 전에 이민을 온 그녀에게 많은 삶의 지혜와 인생을 덤으로 배우며 그 암울하고 딱딱한 원석같은 시간들을 빛내고 있었다. 주3일 짧은 시간을 일하기에 수입은 거의 없지만 이렇게 휴식의 시간을 갖게 되는것에 감사하자고 맘을 다졌다. 화려한 도시속에서의 한국 생활과 캐나다에 와서 시차도 적응안되는 날부터 일에 들어갔던 내게 지금 이 행운은 캐나다를 알게 되는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그치 이러려고 캐나다에 온거지. ㅋㅋ. 돈을 아끼는 차원에서 모든 것을 만들어 주었다. 그것도 빠르게, 덕분에 음식이 많이 늘었고 김치는 정말 맛있다고 칭찬이다. 김치 장사를 해볼까 ㅋ
시간 부자가 이렇게 행복할 줄은 정말 몰랐다. 그리고 이제 앞으로는 돈만 모으면 나는 완벽한 부자가 되는 것이다.
상상하며 이 나이에도 나의 꿈과 희망을 향한 열정은 여름 태양처럼 이글거린다.
드라마속 어느 어른신의 말씀이 생각난다. " 아무리 뛰고 나는 사람들이 많아도 다 니 먹을 것은 있다."라며 자신의 손녀를 다독이던 그 한마디가 내 귓속으로 꿈틀대면서 들어온다. 이 말을 되뇌이며 믿고 믿었다. 믿는 만큼 보이리라.
방을 구하고 있었는데 정말 쉽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결론을 보았다. 한방을 쓰는 건 어떠냐는.
아들은 팔짝 뛰면서 그건 아니라고 했지만 방도 없었고 랜트비도 높았으며 수입이( 가족 사업으로 하시는 그 식당에서는 나를 받아주는 것이 큰 모험이었고 나의 일손이 그렇게 필요한 곳은 아니었다. 정말X감사) 거의 없다보니 얼마나 오랜 기간이 진행될지 모르는 지금 상황에서는 집을 핸트할 수도 없었다(최소 1년을 계약해야 하고 다시 모든 물품들을 구매하고 살림을 차려야 했고, 랜트비와 생활비를 생각하면 아찔했다)
물론 나의 조건도 충족되지도 못한다. 아직 서류를 접수도 못했기 때문이다.(영주권 신청이 가능한 기업으로 신청을 해놓고 허가가 나기를 기다리는 중)
아들의 학교 전학을 마무리하고 여름도 마무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짧고 강렬한 여름은 그렇게 가고 벌써 8월말인데 추위가 엄습하고 있었다. 나는 추위보다 더 떨고 있었다. 빨리 방을 구해서 겨울이 오기전에 우리만의 안식처를 찾고 싶었다.
9월이 되어 아들은 학교를 다니게 되었고 나는 아침마다 그를 위해서 김밥을 만들었다. 그의 요청이었다. 학교에서 음식은 제공되만 우리에게는 간식 수준의 음식들이고 건강에도 좋지 않으니 깔끔하고 단순해서 좋았다.
김밥에 넣는 단무지도 직접 만들어서 절여놓고 소고기 닭고기 돼지고기 참치등 돌아가면서 재료를 달리하며 매일 김밥을 만다. 가끔 간이 약하다는 소리는 했지만 맛없다는 소리 없는 아들의 빈 김밥통이 내게 돌아올때면 나를 웃게 만들고 존재하게 한다.
잔인하도록 멋진 짧은 여름, 더 짧은 가을이 이렇게 우리를 떠나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우리에게 적당한 방을 하나를 만나게 된다.
비가 막 내리던 어느날 시내와도 가깝고 걸어도 일을 다닐 수 있으며 마트도 가까이에 있는 아파트의 방 랜트였다. 캐나다 주인인 그들은 아이가 없는 부부다. 아들과 같이 살만한 작지 않은 크기의 방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편분이 대학 교수이며 화가였다. 벽에는 그의 그림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조금은 산만해 보였지만 미적 감각이 뛰어난 그들의 거실이 좋았다.
아들이 있는데 같이 방을 써도 되냐고 물었더니 안된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곳을 황급히 나왔다.
에휴~ 정말 위치나 가격 그리고 쾌적함이 좋은 곳인데, 다른 적당한 곳이 있을거야 , 라며,
삶은 호락호락하지 않으며 영화나 드라마 처럼 단번에 해피앤딩 되지는 않는다. 스스로 유배시킨 곳.
다이나믹한 삶속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고 단련되어 가고 있다. 어려움도 알게 되고 고마움 귀중함과 같은 인생의 가치를 모르던 우리 가족에게는 꼭 필요한 시간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다시 하라면?? 물론 NO!
나는 늦게 겪고 있지만 울 애들에게는 근사한 미래가 준비 되어 있는것 같아 미안한 마음속에서도 한줄기 빛의 튼튼한 동아줄들 움켜쥐고 있는 듯한 느낌에 든든하고 가슴이 빵빵해진다.
울 애들은 이런 상황에 뭐가 그렇게 좋냐고 불평이다. 그 나이에 돈도 없고 능력도 없고, 그치만 나는 할 수 있다는, 영주권을 만들어서 주는 것으로 나의 역할을 다하고 싶다고 다짐해 본다. 물론 내일을 누가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