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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하고 집요한 우주속 탐험가 요하네스 케플러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고등학교 때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라는 책을 처음 접하면서 많은 흥미를 가졌고 그의 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지금으로 부터 약 30년 전이네요.  ㅋㅋ  그리고 잊고 지내다가 최근에 제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코스모스의 다큐 영상을 보게 되었고 케플러의 대략적인 일대기 (너무 짧지만)를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뉴턴에게도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던 케플러. 자세히 알리고 싶어 지더라고요.  과학적으론 이해가 힘들지만요.  물론 칼 세이건 이분도 암으로 세상을 일찍 떠나셔서 안타깝습니다.  그럼 케플러라는 인물에 대하여 알아볼까요.

 

케플러는 칠삭둥이 미숙아로 태어났어요.  케플러 본인이 어른이 되고 계산한 바에 따르면 부모가 결혼한 다음날 오전 4시 47분에 잉태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것 까지 계산하는 그를 보니 참 특이하죠 많은 천재들이 그렇듯 말이죠.

나는 몇 시 몇 분에 잉태됐을까 잠깐 생각해 봤지만 계산하고 싶지는 않네요. ㅋ

불행하게도 용병일을 하시는 아버지는 가세가 기울자 케플러가 5살 즈음에 집을 나가 버리고 80년 전쟁에서 사망했다고만 추정되고 있어요.  여관집 딸이며 치료사이자 약재상이었던 어머니는 후에 마녀로 몰리고 어머니를 변호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으며 [꿈]이라는 작품 속 마녀가 어머니가 된 것이죠.  지금 같으면 말이 안 되지만요.

어려서 병약했으나 여관에 묵는 사람들을 자신의 수학적 재능으로 놀라게 하곤 했다고 합니다.

 

 

케플러가 여섯 살 때 대혜성을 목격하고 또한 월식을 관찰하면서 평생을 천문학자로 보낸 거죠. 

휴~ 난 벌써 머리가 아파오네요.  😁   

신학과 철학, 수학, 천문학을 했으며 점성술사로써의 별점도 쳐주곤 했다고 합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옹호했고 오스트리아 그라츠 대학의 수학, 천문학 교사로 있게 된 나이가 23세.

난 그 나이에 뭘 했는지 까마득하기만 하네요.  흥청망청. 비밀입니다.  교육자로서의 케플러는 뛰어나지 못했어요. 말도 웅얼거리다 보니 나중에는 수강생이 한 명도 없었다고 합니다.  다들 타나고 소명들이 다르죠.  저는 아직도 재 소명을 찾질 못했어요. 반백에 가까운 지금 계속적으로 기도 하고 있답니다.  이런 포스트 코로나의 변혁기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서 말이에요.

 

케플러는 많은 천재들처럼 바로 인정받지 못했어요.  르네 데카르트 같은 석학자들도  [신천 문학]을 무시했으며, 스승인 미하엘 매스 플린을 포함한 첨 문학자 들은 캐플러가 물리학을 천문학에 대입하려던 시도도 못마땅해했어요.

 

 

 

여러 천문학자들은 케플러의 이론 및 그 이론의 응용 물들을 천체 관측을 통해 검증했어요. 금성과 수성의 정상적으로 관측될 수 없는 상황 하에 이 두 행성의 두 번의 일면 통과로 이론의 민감한 점을 시험할 수 있었고  드디어 1631년 수성 일면 통과의 경우에 수성에 대한 변수가 극단적으로 불호가실하기 때문에 일면통과는 예정보다 일찍 찾아야한다고 충고했으며 정확히 일면통과가 관측됐고 확증 되었네요.  이것이 최초의 수성 일면통과 관측이에요.  그다음은 금성 일면 통과 그러나 안타깝게도 < 루돌프 표>로 부정확에 기인하여 실패했어요.   속상하네요 ㅠ

그 후 금성 일면 통과를 관측한 (재래미 이아 호록스)는 캐플러의 모형을 사용하였고 기계장치를 만들었으며 캐플러 학설을 옹호하는 단체를 남겼다고 합니다.  

 

 

한편, 케플러는 다른 16 ~ 17세기의 천문학자들처럼 근대에 비해 고대의 천문학이 조잡하다는 것을 강조했는데, 스티븐 샤핀에 의하면 케플러의 이런 사상은 《루돌프 표》의 권두화로 사용된 유명한 판화 작품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판화에서 천문학의 여신의 신전의 뒤쪽에는 투박하고 구조적인 양식의 기둥이 고대 천문학의 조잡함을 드러내고 있고, 신전의 앞에 있는 코페르니쿠스와 튀코는 이오니아식·코린트식의 우아한 기둥 옆에 서 있어요.  케플러는 인문주의 자면서도 열광적인 플라톤주의자였는데, 그의 최초의 학설인 ‘코스모스의 신비론'에서 이런 점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케플러의 대표적 저서 중 하나인 《코페르니쿠스 천문학 개요》는 유럽 구석구석의 천문학자들에게 읽혔고, 케플러의 죽음 이후 케플러의 아이디어들을 확산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합니다.  1630년과 1650년 사이에, 이 책은 천문학 교본에 가장 널리 사용되었으며, 천문학의 기반을 타원궤도로 전환시켰습니다.  과학자인 제임스 R. 빌묄은 케플러의 업적이 갈릴레오의 업적보다 천문학적으로 더욱 중요하다고 평가했다고 합니다.  대단하네요.  케플러는 행성운동법칙 제3법칙을 연구할 당시 지구에 적용되는 측정 가능한 물리 법칙, 즉 정량적으로 기술할 수 있는 법칙들이 천체들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점을 간파했고, 이로써 인류사 최초로 천체 운동에서 신비주의가 배제되었네요.

 

또한 케플러는 권력자와 권위자만이 지식을 안전하게 맡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 튀코와는 대조적으로 대학교에서 천문학을 강의했고, 천문학 서적을 출판했으며, SF 소설을 쓰는 등 과학의 대중화에도 힘썼습니다.  케플러는 [꿈]에서 지구의 자전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지동설을 부정하는 대중들에게 지구 자전은 “가능한 일이고 멋있으며 이해할 수 있는 것”임을 알리려고 애썼으며,  물론 케플러는 현대의 과학저술가들만큼 과학 대중화에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하지만 세이건은 튀코에서 케플러에 이르는 한 세대 사이에 과학자들의 대중에 대한 태도가 변화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평가했다.

케플러는 미래에 대한 통찰력도 발휘했는데, 그는 미래의 하늘에 “천상의 바람을 잘 탈 수 있는 돛단배”들이 날아아다니고 우주 공간이 “우주의 광막함을 두려워하지 않는 탐험가들”로 그득할 것이며, “용기 있는 인간은 무한한 공간으로 진출할 것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는 지속적으로 발전되어 가고 있으니 정말 그의 통찰력에 감탄할 따름입니다.

 

케플러의 우주 망원경.

2009년 미국 항공 우주국은 캐플러의 천문학에 대한 기여를 기리기 우해 우주 망원경에 케플러의 이름을 붙였으며, 이것이 캐플러 계획이라고 합니다.

뉴질랜드의 피오 르랜드 국립공원에는 캐플러의 이름이 붙은 산맥이 있고 케플러 트랙이라는 산책로도 있지요.  물론 대학 이름으로도 그의 명성을 기리고 있습니다.  

 

이렇듯, 이제 케플러는 과학의 현대화와, 그 이전의 인물들의 아이콘이자, 대중적인 이미지로서 자리 잡았다. 과학의 대중화에 힘쓴 저명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케플러를 “마음에 드는 환상보다 냉혹한 현실의 진리를 선택한최초의 천체물리학자이자, 최후의 과학적 점성술사"라고 평가했다고 합니다.